벌거벗은 한국사 이완용 편
이완용은 어떻게 조선을 팔아먹었나?
처음에 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일본을 미워했었다는데 몰랐던 사실이었다.
변절을 한 것이었겠지.
그 당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이완용은 주미대사관으로 미국에서 몇 년간 지내게 되었고 그 덕에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진 후 승자인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이 극심해 진다.
일본을 견제하려 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이것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른다.
그 후 불안해하는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구출하려다가 실패한 이완용은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킨다.
그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이완용은 친일파들에게 여러 차례 쫓겨났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의 눈에는 친러파로 보였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이완용은 이하영에게 친일파들과 다리를 좀 놔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친일파가 된 이완용은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을사 늑약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그 무렵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을사 늑약을 위함이었다.
그리고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는 독대를 하게 되고 고종에게 을사 늑약 체결에 대한 협박을 하게 된다.
고민에 빠진 고종은 대신들과 회의를 하게 되고 을사 늑약에 대한 반대 결론을 낸다.
반대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들을 이끌고 고종을 찾아온다.
최대한 을사 늑약을 미루려고 했던 고종은 대신들과 논의하라고 하고 자리를 피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날 조약을 체결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고 군사들과 대신들을 겁박하여 대신들을 한 곳에 모아 놓는다.
대신 8명에게 한 명 한 명에게 이토는 조약 체결에 대한 의견을 묻는데 그중 5명의 대신들이 찬성을 하게 되고 을사 늑약은 체결이 되며 그때 찬성한 5명을 일컬어 그들을 을사오적으로 칭한다.
헤이그 특사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헤이그 특사 사건은 일본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고 일본은 그것에 대한 수습의 의미로 일왕에게 고종이 직접 가서 사과를 하고 오라고 한다.
그 말의 전달자는 이토의 총애를 받던 이완용이었다.
그렇게 일본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이완용에게 큰 위기가 오는데 자신을 총애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도시락 폭탄에 이토가 죽은 것이다.
그 무렵 이완용도 이재명 의사에게 칼로 습격을 받아 죽다가 살아나게 된다.
한일 강제병합조약 1910년
[대한제국의 통치 권한을 일본이 갖게 된다는 조약]
일본의 조선 침략에 막대한 힘이 된 이완용은 어린아이들부터 일본어를 배우게 했고 이순신 전기를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민족의 정기를 끊어 버리겠다는 의도였다.
이완용은 3700평짜리 대 저택에서 지내며 300만 원까지 현금을 늘리게 된다.
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여의도의 8배의 땅을 가지고 있던 땅부자 이기도 했다.
그리고 1926년에 죽게 되고 신문에 이런 문구로 기록이 된다.
팔아선 안 되는 것을 팔아서 누려서는 안되는 것을 누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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